
[후기] 탄핵, 그리고 그 너머의 광장
- 대구여성노동자회 활동가 토리의 4개월간 눈물의 탄핵기 -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건 평생 처음이었다. 바다와 그동안 고생했다고 안으며 울었다. 사진을 찍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우는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파면과 동시에 세상이 ‘뿅’하고 변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곧 무너졌다. 뉴스를 보면 윤석열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내란범을 감싼 국민의힘 의원들은 뻔뻔하게 대선에 뛰어들었다. 거대양당은 광장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을 외면한 채 표 계산에만 몰두하는 것을 보며 다시 계엄 이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4개월간의 탄핵 광장을 거치며 적어도 나는, 우리는 달라졌다. 더는 계엄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광장에서는 불쑥불쑥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눈물이 나는 이유를 스스로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순간들도 많았다. 슬픔뿐만 아니라, 분노, 벅참, 연대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감정들을 천천히 되짚어보며, 탄핵 광장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려 한다.

4월 4일 윤석열 파면 선고 당시 울면서 찍은 사진
눈물이 나는 순간들은 굉장히 다양했다. 진심 어린 자유발언을 들을 때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아서, ‘다시 만난 세계’의 가사를 곱씹으며 행진할 때, 집회나 행진 중 극우들이 욕설을 던져도 그 사이를 뚫고 나아가는 시민들을 볼 때 눈물이 났다. 극우들을 마주할 때마다 슬펐지만, 그런 현실에도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더 벅찼다.
광장은 늘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같은 구호를 외쳤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 혐오발언들. 그리고 활동가인 나에게 ‘기특하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씁쓸함.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제들이 ‘나중에’로 밀려날 때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광장에 나간 이유는 사명감뿐만이 아니었다. 광장이 주는 해방감이 있었다. 기존 집회에 나갈 때 ‘동지’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함께 구호를 외치며 서로를 지키고 있는 광장에서 ‘동지’의 의미가 나에게 생생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연대감이 일주일 간 뉴스를 보며 불안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잊게 해주었다. 또 활동가로서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큰 집회를, 이렇게 자주 겪을 기회는 흔치 않았고, 항상 익숙한 얼굴들만 보이던 집회가 아니라, 처음 보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는 이 집회에서 대구여성노동자회를 더 알리고 싶기도 했다.

매 시국대회 마다 열심히 흔든 대구여성노동자회 깃발
이번 계엄 사태를 겪으며 과거의 민주화 운동을 한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도 커졌다. 사실 계엄의 순간 생방송을 보며 나는 싸울 용기도 없는데 어떻게 활동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지, 나는 참 포시랍게 활동을 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의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를 절실히 깨달았다. 시민들이 쌓아올린 민주주의를 다시 새기게 되었다.
이렇게 탄핵 광장에서 몰입하며, 마치 게임에서 ‘경험치 2배 이벤트’를 진행하듯이 나도 단기간에 활동가 경험치가 두 배로 쌓인 것 같다. 좋은 기회로 행진 사회도 맡게 되어 총 8번의 행진 사회를 진행했다. 처음 행진 트럭에 올라갈 때는 다리가 달달 떨렸다. 트럭 위가 높아서 떨리는 건지, 긴장을 해서 떨리는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럭 위에서 바라본 행진 대열은 정말 멋졌다. ‘다시 이런 광경을 마주할 수 있을까’ 싶어, 열심히 눈에 담았다.

행진 트럭 위에서 바라본 시민들의 모습
행진 준비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본을 쓰고, 구호를 정하고, 행진 노래를 고르는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간 평등수칙에 어긋나는 건 없는지 계속 점검했다. 특히, 행진 노래는 “이 말은 누군가에게 차별적이지 않을까?”, “이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잘 담고 있을까”를 고려하며 가사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대중성까지 고려하여 정했다. 유행하는 노래가 있으면 나도 모르게 구호를 맞춰보며 행진 노래로 쓰기에 적절한지 따져봤다. 한동안은 집회가 끝나도 행진에서 쓰였던 노래가 나오면 그 노래의 가사가 아닌 ‘파면파면 윤석열 파면’을 외치고 있었다. 구호 연습도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틀리지 않는 것에만 집중해서 어색하고 뚝딱거리던 구호와 노래도 점점 즐기면서 외칠 수 있게 되었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입꼬리도 어느새 올라가 있었다.

윤석열은 파면됐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이미 계엄 전부터 삶이 계엄과 같았던 사람들이 있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거리로 내몰리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광장은 이어지고 있다. 고공농성중인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들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 원청과의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 노동자들, 그리고 혜화동성당에서 탈시설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인동지들. 그들이 승리하는 날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날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두 번째 기쁨의 눈물을 반갑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옵티칼 희망버스에서 대구여성노동자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일부 사진 출처 :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후기] 탄핵, 그리고 그 너머의 광장
- 대구여성노동자회 활동가 토리의 4개월간 눈물의 탄핵기 -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건 평생 처음이었다. 바다와 그동안 고생했다고 안으며 울었다. 사진을 찍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우는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파면과 동시에 세상이 ‘뿅’하고 변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곧 무너졌다. 뉴스를 보면 윤석열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내란범을 감싼 국민의힘 의원들은 뻔뻔하게 대선에 뛰어들었다. 거대양당은 광장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을 외면한 채 표 계산에만 몰두하는 것을 보며 다시 계엄 이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4개월간의 탄핵 광장을 거치며 적어도 나는, 우리는 달라졌다. 더는 계엄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광장에서는 불쑥불쑥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눈물이 나는 이유를 스스로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순간들도 많았다. 슬픔뿐만 아니라, 분노, 벅참, 연대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감정들을 천천히 되짚어보며, 탄핵 광장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려 한다.
4월 4일 윤석열 파면 선고 당시 울면서 찍은 사진
눈물이 나는 순간들은 굉장히 다양했다. 진심 어린 자유발언을 들을 때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아서, ‘다시 만난 세계’의 가사를 곱씹으며 행진할 때, 집회나 행진 중 극우들이 욕설을 던져도 그 사이를 뚫고 나아가는 시민들을 볼 때 눈물이 났다. 극우들을 마주할 때마다 슬펐지만, 그런 현실에도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더 벅찼다.
광장은 늘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같은 구호를 외쳤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 혐오발언들. 그리고 활동가인 나에게 ‘기특하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씁쓸함.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제들이 ‘나중에’로 밀려날 때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광장에 나간 이유는 사명감뿐만이 아니었다. 광장이 주는 해방감이 있었다. 기존 집회에 나갈 때 ‘동지’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함께 구호를 외치며 서로를 지키고 있는 광장에서 ‘동지’의 의미가 나에게 생생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연대감이 일주일 간 뉴스를 보며 불안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잊게 해주었다. 또 활동가로서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큰 집회를, 이렇게 자주 겪을 기회는 흔치 않았고, 항상 익숙한 얼굴들만 보이던 집회가 아니라, 처음 보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는 이 집회에서 대구여성노동자회를 더 알리고 싶기도 했다.
매 시국대회 마다 열심히 흔든 대구여성노동자회 깃발
이번 계엄 사태를 겪으며 과거의 민주화 운동을 한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도 커졌다. 사실 계엄의 순간 생방송을 보며 나는 싸울 용기도 없는데 어떻게 활동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지, 나는 참 포시랍게 활동을 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의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를 절실히 깨달았다. 시민들이 쌓아올린 민주주의를 다시 새기게 되었다.
이렇게 탄핵 광장에서 몰입하며, 마치 게임에서 ‘경험치 2배 이벤트’를 진행하듯이 나도 단기간에 활동가 경험치가 두 배로 쌓인 것 같다. 좋은 기회로 행진 사회도 맡게 되어 총 8번의 행진 사회를 진행했다. 처음 행진 트럭에 올라갈 때는 다리가 달달 떨렸다. 트럭 위가 높아서 떨리는 건지, 긴장을 해서 떨리는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럭 위에서 바라본 행진 대열은 정말 멋졌다. ‘다시 이런 광경을 마주할 수 있을까’ 싶어, 열심히 눈에 담았다.
행진 트럭 위에서 바라본 시민들의 모습
행진 준비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본을 쓰고, 구호를 정하고, 행진 노래를 고르는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간 평등수칙에 어긋나는 건 없는지 계속 점검했다. 특히, 행진 노래는 “이 말은 누군가에게 차별적이지 않을까?”, “이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잘 담고 있을까”를 고려하며 가사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대중성까지 고려하여 정했다. 유행하는 노래가 있으면 나도 모르게 구호를 맞춰보며 행진 노래로 쓰기에 적절한지 따져봤다. 한동안은 집회가 끝나도 행진에서 쓰였던 노래가 나오면 그 노래의 가사가 아닌 ‘파면파면 윤석열 파면’을 외치고 있었다. 구호 연습도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틀리지 않는 것에만 집중해서 어색하고 뚝딱거리던 구호와 노래도 점점 즐기면서 외칠 수 있게 되었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입꼬리도 어느새 올라가 있었다.
윤석열은 파면됐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이미 계엄 전부터 삶이 계엄과 같았던 사람들이 있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거리로 내몰리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광장은 이어지고 있다. 고공농성중인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들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 원청과의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 노동자들, 그리고 혜화동성당에서 탈시설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인동지들. 그들이 승리하는 날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날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두 번째 기쁨의 눈물을 반갑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옵티칼 희망버스에서 대구여성노동자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일부 사진 출처 :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